중국은 중국공산당이 창당되기 이전에 정국이 엄청나게 혼란스러웠습니다. 청 왕조가 쇠퇴하면서 각 지역의 군벌들이 할 거하여 중국을 혼란에 빠트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중국의 건국 과정과 그 과정에서 일어난 시안사변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중국공산당 창당과 1차 국공합작
중국공산당이 창당되기 이전에 중국의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워 열강들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정세 속에서 쑨원은 중국의 정치적인 지위 평등과 국제적인 지위 평등, 경제적 지위 평등을 촉구하는 군국주의를 외치면서 중국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쑨원은 1912년 1월 1일에 난징에 중화민국을 건국하고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되며, 군벌들을 토벌하기 위해 북벌계획에 착수하였습니다. 하지만 1919년에 러시아의 공산혁명에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1921년 7월에 중국공산당이 창당됩니다. 이에 중국은 쑨원의 국민당과 천두슈의 공산당이 함께 공존하는 형국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원은 초기에 극소수에 불과하였고 조직체계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으며, 투쟁 훈련과 경험도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군벌 세력과 관료가 정권을 장악하였던 시기로 전국이 분열되면서 산업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각 지역에서 할 거하고 있던 군벌들이 외세와 결탁하여 중국을 분열시켰습니다. 그래서 쑨원은 북벌을 개시하였지만 쿠데타로 정권을 잃고 상하이로 도주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쑨원은 1924년 1월에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제1차 국공합작을 시작하였습니다. 1925년에 갑작스럽게 쑨원이 병사하게 되고 장제스가 후임으로 국민당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26년 3월 20일에 중산함 사건이 일어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상한 유언이 퍼지면서 장제스가 50여 명의 공산단원을 체포한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 장제스가 상하이와 광저우의 공산당을 숙청하고 난징에 우파의 국민당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이후 상하이와 난징의 공산당원과 노동자를 대량 학살하여 공산당은 국공합작의 해체를 선언하였습니다. 이로써 공산당과 국민당의 동맹은 붕괴되고 1927년 7월 15일에 국민당이 공산당과 결별을 선언하여 국공합작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
국공합작이 결렬되고나서 장제스 중심의 국민당이 통일정부를 수립되는 동안 공산당은 살 길을 모색하였습니다. 국민당과 결별 후 공산당은 3만 명의 봉기 군을 데리고 난창봉기를 일으켰지만 국민당의 역습으로 인해 실패하였습니다. 이후 공산당은 도시와 농촌에서 다시 대규모 무장봉기를 시도하였지만 실패를 하게 되고 마오쩌뚱은 패배한 봉기 군과 함께 징강산으로 들어가 근거지를 구축하였습니다. 이곳에서 마오쩌둥과 주 더는 세력을 규합하여 주민과 영토, 군대를 모두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11개 성까지도 공산당 세력으로 확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혁명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홍 군을 창설하였습니다. 이후 공산당은 토지제도 개혁에 심혈을 기울이고 대중과 철저하게 결합하였습니다. 이러한 토지 재분배와 생산조직을 재정비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이 증가하였습니다. 그 결과 공산당이 농민세력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제스가 공산당군을 포위하여 공격을 시작하자 공산당군은 매복전술과 게릴라 전법으로 대응하였습니다. 즉, 국민당군을 기지로 유인하여 공격하였고 모두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모스크바 중앙위원회에서 적극적인 전면전을 요구하면서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를 반대하던 마오쩌둥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공산당군은 계속 패배하면서 많은 병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공산당군은 탈출을 하는 대장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중국의 서북 지역에 있는 옌안까지 긴 대장정을 시작하여 결국 1년 후에 도착하였는데 처음 병력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인원만 살아남았습니다. 이 대장정을 통해 마오쩌둥이 중국공산당 내의 지도력을 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빈농계층과 소수민족을 포섭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대장정으로 인해 공산당이 국공내전을 승리할 수 있는 역사적인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 시안에서 발생한 사건(시안사건)
국민당의 장제스정부는 일본군에게 저항하지 않는 무저항주의로 일관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각지에서는 일본침략 및 국민당의 무저항주의에 관련한 시위가 벌어지고 공산당 내의 항일 호소는 국민당 내부에서도 지지를 받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국민당군의 지도자는 장쉐량과 양후청이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군에게 아버지를 잃게 된 장쉐량은 항일여론에 동조하면서 구국을 요구했지만 여전히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 우선주의를 목표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일치항일을 권유했지만 장쉐량은 거절하고 장제스와 간부들을 모두 가두고 항일요구를 발표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산당과 국민당에게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던 시안사건입니다. 그러나 항일전쟁을 위해선 장제스의 지도력이 필요하여 서로 타협을 하는 방향으로 정했습니다. 이후, 마오쩌둥이 파견한 저우언라이와 장제스는 장쉐량의 요구대로 공산당과 국민당이 내전 종식에 합의하였고 공산당과 항일투쟁에 함께 나서기로 합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장쉐량은 지휘권이 박탈되고 10년형의 금고에 처한 후 나중에 석방되었습니다. 이러한 시안사건을 통해서 국민당의 공산당토벌 우선주의에서 민족저항으로 변화하게 된 출발점이 되었고 국공내전으로 무너지기 직전인 공산당을 구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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